2026. 9. 26. 19:20ㆍ보행 안전시설
올해 4월 경찰청과 한국도로교통공단이 발표한 2025년 교통사고 통계에서 보행자 부분만 떼어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행자 사고는 줄었는데, 사고로 숨진 보행자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사고가 덜 나는데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사고 한 건 한 건이 더 크게 다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는 통계 속 숫자 다섯 개를 골라 각각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그 자리에 어떤 시설이 필요한지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숫자 하나, 926명
2025년 한 해 동안 보행 중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은 926명입니다. 2024년의 920명보다 6명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보행자 사고 건수는 36,706건에서 35,356건으로 3.7% 줄었습니다. 건수는 줄고 사망자는 늘어난 셈입니다.
보행자가 크게 다치느냐는 부딪히는 순간 차의 속도에 크게 좌우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차 앞부분에 부딪힌 보행자의 사망 위험이 시속 50km에서 65km로 올라가는 것만으로 4.5배 커진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나라가 2021년 4월부터 도시 지역 일반도로는 시속 50km, 주택가 이면도로는 시속 30km로 제한속도를 낮춘 '안전속도 5030'을 시행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보행자가 많은 곳의 시설은 대부분 차의 속도를 먼저 낮추도록 만들어집니다. 횡단보도 자체를 보도 높이로 올린 고원식 횡단보도와, 주택가 이면도로의 과속방지턱이 대표적입니다. 두 시설 모두 표지판으로 부탁하는 대신 도로의 모양으로 속도를 줄이게 합니다.
숫자 둘, 36%
같은 해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는 2,549명입니다. 이 가운데 보행자 926명은 약 36.3%를 차지합니다. 2024년에도 보행자 비율은 36.5%였습니다.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 셋 중 한 명 이상이 차 안이 아니라 길을 걷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WHO에 따르면 세계적으로도 교통사고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보행자, 자전거 이용자, 이륜차 운전자처럼 몸이 바깥에 드러난 교통약자입니다.
차에는 안전띠와 에어백이 있지만 걷는 사람에게는 몸을 지켜 줄 장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행자 안전은 사람과 차가 만나는 지점을 줄이고, 만나더라도 정해진 곳에서만 만나게 하는 방향으로 설계됩니다. 보도와 차도 사이의 보행자 방호울타리와 도로 가운데의 무단횡단 금지시설이 바로 그 역할을 합니다.
숫자 셋, 67%
국토교통부가 2025년 5월 발표한 교통사고 사망자 감소대책에 따르면, 2024년 보행 사망자 920명 가운데 65세 이상이 616명, 약 67%였습니다. 보행 중 숨지는 사람 셋 중 둘이 어르신이라는 뜻입니다. 2025년에도 65세 이상 보행자 사고는 11,498건으로 전년보다 1.7% 늘었고, 같은 기간 65세 이상 인구는 993만 명에서 1,051만 명으로 5.8% 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멀리서 다가오는 차의 속도를 가늠하기도 어려워집니다. 신호가 바뀐 뒤 한 박자 늦게 출발하거나, 건너는 도중 신호가 끝나 도로 한가운데에 남게 되는 일도 생기기 쉽습니다. 넓은 도로를 한 번에 건너기 힘든 분들에게는 남은 시간을 보여 주는 보행신호 잔여시간표시기와, 도로 중간에서 한 번 쉬어 갈 수 있는 교통섬이 큰 도움이 됩니다.

숫자 넷, 오후 4시에서 8시
경찰청 분석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간대입니다. 65세 미만 보행자의 사망사고는 저녁부터 밤까지, 오후 6시에서 자정 사이에 몰립니다. 반면 65세 이상은 오후에서 이른 저녁인 오후 4시에서 8시, 그리고 아침 6시에서 8시에 사고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어르신들이 이른 아침 운동이나 장보기, 병원에 다녀오는 시간과 겹칩니다.
두 시간대의 공통점은 빛입니다. 해가 뜨기 전후와 해 질 녘은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전이라 운전자가 보행자를 늦게 알아보기 쉽습니다. 횡단보도 위의 사람을 따로 비추는 횡단보도 집중조명이 이 시간대에 특히 중요한 이유입니다. 9월 말부터는 해가 빠르게 짧아져서, 같은 오후 6시라도 여름보다 훨씬 어둡습니다. 어두운 옷을 입은 보행자는 전조등 불빛 속에서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행자 쪽에서도 밝은 옷이나 반사 소재를 챙기는 것이 좋습니다.
숫자 다섯, 초당 0.7m
신호등의 보행 시간은 사람이 1초에 1m를 걷는다는 기준으로 계산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국토교통부는 전통시장이나 병원 근처처럼 65세 이상 보행자가 많이 다니는 횡단보도 1,000곳을 골라, 이 기준을 1초에 0.7m로 낮춰 보행 신호를 늘리겠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길이의 횡단보도라면 건너는 데 주어지는 시간이 약 1.4배로 늘어나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1초에 1m 기준으로 20초가 필요한 거리는, 1초에 0.7m 기준으로는 약 29초가 필요합니다.
신호 시간을 늘리는 것은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효과가 분명한 대책입니다. 차가 기다리는 시간은 몇 초 길어지지만, 그 몇 초가 걸음이 느린 어르신을 도로 한가운데에 남겨 두지 않게 해 줍니다. 다만 운전자 입장에서는 녹색 신호가 끝나 갈 때 건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통계를 읽을 때 알아 둘 기준
경찰청 교통사고 통계는 경찰에 접수된 사고를 기준으로 하고, 사망자는 사고가 난 뒤 30일 안에 숨진 사람을 셉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보험으로만 처리한 가벼운 사고는 빠져 있을 수 있어서, 실제로 일어난 사고는 이보다 많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한 해의 숫자만 보면 우연히 늘거나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몇 년 동안의 흐름을 함께 봐야 합니다. 보행 사망자는 2024년에 전년보다 3.8% 늘었고, 2025년에도 다시 늘었습니다. 두 해 연속 늘었다는 점에서 우연으로 넘기기 어려운 흐름입니다.
숫자와 시설 이어 보기
| 숫자 | 뜻 | 필요한 시설 |
| 926명 | 사고는 줄어도 사망자는 늘었음 | 고원식 횡단보도, 과속방지턱 |
| 36% | 사망자 셋 중 한 명 이상이 보행자 | 보행자 방호울타리, 무단횡단 금지시설 |
| 67% | 보행 사망자 셋 중 둘이 65세 이상 | 잔여시간표시기, 교통섬 |
| 오후 4~8시 | 어르신 사고가 많은 시간 | 횡단보도 집중조명 |
| 0.7m | 어르신 기준 보행 속도 | 보행 신호 시간 연장 |

걷는 사람의 몫, 운전하는 사람의 몫
숫자는 시설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보여 줍니다. 걷는 사람은 녹색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하면 무리하게 건너지 말고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해 질 녘과 이른 아침에는 운전자가 나를 보지 못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차가 멈추는 것을 확인한 뒤 건넙니다. 휴대폰 화면을 보거나 이어폰을 낀 채 건너면 다가오는 차를 알아차리는 것이 늦어지니, 횡단보도 앞에서는 잠시 화면에서 눈을 떼는 것이 좋습니다. 횡단보도가 조금 멀더라도 정해진 곳으로 건너는 것이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입니다.
운전하는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서 보행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신호가 바뀐 직후나 끝나 갈 무렵에는 걸음이 느린 보행자가 아직 도로 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2022년 7월부터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을 때뿐 아니라 건너려고 할 때에도 운전자가 일시정지해야 하고, 2023년 1월부터는 우회전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그 신호를 따라야 합니다. 우회전할 때는 건너려는 사람까지 확인한 뒤 움직이고, 전통시장이나 병원, 경로당 근처에서는 평소보다 한 번 더 좌우를 살피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통계가 가리키는 방향
2025년 통계는 보행자 안전의 중심이 어르신과 어두운 시간대로 옮겨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도로 시설은 그 흐름에 맞춰 속도를 낮추고, 건너는 시간을 늘리고, 어두울 때 사람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시설이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속도를 낮추고 시간을 늘리고 빛을 더하는 작은 변화가 모이면 숫자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숫자가 커지는 속도보다 시설과 습관이 바뀌는 속도가 빨라져야 내년 통계에서 926이라는 숫자가 줄어들 것입니다.
참고 자료
- 경찰청·한국도로교통공단 2025년 교통사고 통계(2026년 4월 발표) — 머니투데이 보도, 교통일보 보도, 장애인복지뉴스 보도
- 국토교통부 2025년 도로 교통사고 사망자 감소대책(2025년 5월 발표) — 서울신문 보도
- 한국도로교통공단 2024년 교통사고 통계 — 프레시안 보도
- 세계보건기구(WHO) Road traffic injuries 팩트시트
- 법제처 보행자 일시정지 의무 확대 「도로교통법」 시행 안내
- 한국도로교통공단 TAAS 교통사고분석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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